![사진 : 영화 '어쩔수가없다' 포스터 [CJ ENM]](http://www.museonair.co.kr/data/photos/20251042/art_17603245992375_d90ef9.jpg?iqs=0.5331986537572085)
“어쩔 수 없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내뱉어 본 이 짧은 문장은 때로는 책임의 회피가 되고, 때로는 절박함의 고백이 되며, 때로는 폭력의 변명이 되기도 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 무심한 말 속에 숨겨진 인간의 윤리, 사회의 구조, 그리고 생존의 본능을 해부하듯 펼쳐놓는다.
그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이름 그대로 현대사회의 무기력한 윤리적 패배를 묻는 장르적 성찰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그려낸 블랙코미디다.
![사진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http://www.museonair.co.kr/data/photos/20251042/art_17603245914438_fb70a6.jpg?iqs=0.008074570739863174)
영화의 주인공 유만수(이병헌)는 제지업체에서 25년간 성실히 일해 온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는 가정을 책임지고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며 두 마리 개까지 돌보는 가장이다. 그의 삶은 너무나 일상적이기에 특별할 것 없지만 바로 그 ‘평범함’이 박찬욱의 렌즈를 통해 사회 구조의 균열로 확장된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예고 없이 해고된 만수는 재취업 시장이라는 냉혹한 세계에 던져진다. 문제는 오랜 세월 쌓아온 자존감과 정체성마저 흔들린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손끝에서 흩어지는 ‘종이’는 더 이상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계약서의 냉정한 문구, 해고 통지서의 무정한 통보, 이력서에 새겨진 절박한 꿈, 그리고 끝내 살인을 유인하는 가짜 모집 공고까지 이 모든 종잇장은 인간의 절실함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가볍고, 찢기는 순간 그 안에 깃든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진다.
박찬욱 감독은 이 ‘종이’를 디지털화된 세상의 아날로그적 허약함으로 치환한다. 화면 속에서 종이는 인간의 노동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처럼 흔들리며 주인공 만수는 그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종이가 더 이상 그를 구원하지 못하는 순간, 영화는 아날로그적 유산의 몰락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가장 인상적인 전환점은 주인공이 취업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가짜 구직 광고’를 뿌리는 시점이다. 이 장면은 영화적 장치로는 매우 블랙코미디적이지만, 현실의 사회 구조 속에서는 오히려 섬뜩할 정도로 가능성이 느껴지는 설정이다. 거짓 공고 속에 숨은 살인의 논리는 디지털 시대의 익명성과 경쟁주의가 빚어낸 괴물이 되어 관객에게 아이러니와 씁쓸함을 동시에 준다.
그가 택한 방식은 법과 윤리, 인간성을 모두 벗어난 것이지만 박찬욱은 만수의 폭력을 외려 그가 왜 그런 선택에 이르렀는지 그 절차와 감정의 무게를 천천히, 정직하게 따라간다.
만수가 외치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자기파괴적인 설득이며, 자기 정당화를 통한 생존의 몸부림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그를 완전히 미워하지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미묘한 감정의 중간 지대에 놓이게 된다. 박찬욱은 바로 그 ‘중간의 불편함’을 통해, 윤리와 생존 사이에서 우리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시적으로 포착한다.
![사진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http://www.museonair.co.kr/data/photos/20251042/art_17603245921125_d8dd47.jpg?iqs=0.9521485462281114)
이 영화에서 이병헌의 연기는 실로 놀랍다. 그는 무너지기 직전의 고요한 절망부터 극단적 행동을 감행할 때의 내면의 분열, 그리고 끝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까지 모든 감정을 끌어낸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한 시대를 통과하는 얼굴’로 기능한다.
![사진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http://www.museonair.co.kr/data/photos/20251042/art_17603245907775_db4c80.jpg?iqs=0.3235451802285103)
또한 손예진은 이병헌과의 첫 호흡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미리라는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대놓고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녀의 눈빛과 말투, 주방에서의 짧은 정지, 거실에서의 무심한 대화 속에 감정의 겹이 숨어 있다. 그녀는 가정이라는 시스템이 무너질 때, 그 틈에서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인물로서 관객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사진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http://www.museonair.co.kr/data/photos/20251042/art_17603245977495_6397ca.jpg?iqs=0.5903209931927502)
더불어 이성민, 박희순, 차승원, 염혜란 등 조연 배우들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만수의 세계를 채워간다. 특히 이성민은 ‘또 다른 만수’로서 이 시대 가장들의 보편적 절망을 대변하며, 박희순은 사회 시스템의 무정한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작동한다. 이점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하나의 사회적 지형도를 구성하는 기호처럼 보인다.
박찬욱 감독은 오랜 시간 ‘감정의 미학’을 통해 영화적 정체성을 구축해 왔다. <올드보이>에서의 처절한 복수, <아가씨>에서의 감각적 욕망, <헤어질 결심>에서의 서정적 미스터리까지 그는 인간의 심연을 시적으로 해부해왔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그가 처음으로 ‘사회적 작가’로서의 목소리를 본격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인간의 욕망보다, 시스템과 구조, 그리고 그 속에서의 ‘생존 본능’에 더 집중한다. 이는 분명 박찬욱 영화세계의 중요한 전환점이며, 그가 이제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자동화 시스템, AI, 무인 면접 공간 등은 만수의 노력 자체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준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자리조차 결국 인간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내던져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절망을 유예한다. 왜냐하면 만수는 끝내 ‘선택’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모든 것을 정리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만큼은 어떤 종류의 책임감과 후회를 떠안으며 인간으로 남으려 했다.
![사진 : 영화 '어쩔수가없다' 포스터 [CJ ENM]](http://www.museonair.co.kr/data/photos/20251042/art_1760324600057_bf2cb4.jpg?iqs=0.9510776133046485)
끝으로,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외우는 주문이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막이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그 방어막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우리가 정말 ‘어쩔 수 없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고, 아름다울 정도로 날카롭다.
사진 : 영화 '어쩔수가없다' 포스터 및 스틸컷 [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