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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9 (수)

영화 <소주전쟁>, 잔을 기울이면 비로소 보이는 자본과 사람의 이야기

IMF 시대, 한 병의 소주에 담긴 치열한 생존기를 담은 영화 <소주전쟁>
한줄 평ㅣ 잔을 기울이며 마주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 소주 한 병에 담긴 사람과 기억의 이야기!

 

1997년, 전 국민의 체온이 경제 위기의 불안으로 얼어붙었던 그 겨울. 수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거리엔 실직자가 넘쳐났다. 강제 퇴직과 구조조정, 그리고 외자 유치라는 이름의 경영권 매각까지 당시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자본주의의 급류에 휩쓸리고 있었다. 강윤진 감독의 신작 <소주전쟁>은 바로 그 한가운데서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진다.

 

<소주전쟁>은 재무적 위기를 맞은 가상의 소주회사 ‘국보소주’를 무대로, 회사의 존속을 위해 애쓰는 인물들과 글로벌 투자사의 인수 시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를 그린다. 이 작품은 실존하는 국내 소주 브랜드의 역사와 맞닿은 픽션이기도 하며, 동시에 자본과 가치, 사람과 시스템이 충돌하는 한국형 기업극의 묵직한 현대사로도 읽힌다.

 

 

영화는 주인공 표종록(유해진)의 시점에서 출발한다. 국보소주 재무이사인 그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분투하며, 한편으론 새로운 주주로 들어온 외국계 투자사 직원 최인범(이제훈)과 치열한 수싸움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국보그룹 회장 석진우(손현주), 법무법인 대표 구영모(최영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등장하며 서사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단순하다. 기업 인수와 방어라는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인물 간의 충돌. 하지만 <소주전쟁>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 단순한 구조 속에 경제논리와 정서적 공감, 시대적 무게감을 한 병의 소주에 녹여냈다는 데 있다. 자본은 인물들을 지배하지만, 그들의 선택과 감정, 관계는 여전히 인간적이며 바로 그 틈새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고통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영화 <소주전쟁>에서 캐스팅은 영화의 반 이상을 책임진다. 유해진은 특유의 인간미로 표종록을 연기하며, 소시민의 두려움과 신념을 동시에 담아냈다. 격식을 차리기보다 사람을 택하는 인물의 행동은, 유해진의 연기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반면, 이제훈은 깔끔하고 절제된 연기로 냉철한 외국계 투자사 직원 최인범을 그려냈다. 표면적으로는 경제논리만 따르는 냉정한 젊은이지만, 내면에 일말의 흔들림이 있음을 표현해내는 연기력은 인상 깊다.

 

 

손현주는 회장 석진우 역으로 등장해 단단한 카리스마를 유지하며 서사의 중심을 단단히 잡고 있고, 최영준 역시 존재감 있는 조연으로 극의 논리적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 네 인물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긴장감은 단순한 경영권 분쟁을 넘어서, ‘사람 대 사람의 대화’로 전환된다는 부분에서 이 영화의 특징이 잘 묻어난다.

 

연출적인 면모도 눈에 띈다. 강윤진 감독의 연출은 한마디로 절제되어 있다. 눈에 띄는 시각적 실험이나 감정 과잉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한 장면 한 장면을 차분하게 밀도 있게 끌고 가며, 등장인물의 감정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영화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법정 드라마 혹은 기업극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립과 반전의 공식 대신, 이 영화는 선택과 타협, 포기와 인정이라는 보다 인간적인 감정의 스펙트럼에 집중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영화 <소주전쟁>에서 주요 대사들은 무겁고 상징적이다. “소주 한 병 값으로 바뀌는 게 기업이야? 사람이야?”와 같은 대사는 단순한 감상적 언어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처럼 들린다. 실제로 1997년 이후 한국 자본 시장의 외국 자본 유입과 국내 기업 매각 사례를 떠올려 보면, 이 영화가 단지 과거를 회고하는 영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소주전쟁>의 진짜 묵직한 미덕은 그 시대적 맥락에 있다. 1997년 IMF는 한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꿔놓은 분기점이었다. 재벌 해체, 금융시장 개방, 실업자 폭증 그 혼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지켜낼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이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 역시 대기업의 외국계 자본 유입, 벤처 생태계의 불균형, 구조조정 문제 등 IMF와 유사한 구조적 위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소주전쟁>은 그런 현실에 대해 지나친 선악 구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소주는 한국인의 가장 보편적인 술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소주라는 소재를 통해 한국인의 감정과 관계, 경제와 사회를 동시에 담아낸다. ‘소주전쟁’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제품을 둘러싼 상업적 다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와 철학, 선택과 생존의 싸움으로 치환되었다.

 

그리고 결국 영화는 조용한 질문으로 끝맺는다. “당신이라면 회사를 팔겠습니까? 사람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물음에 영화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유해진의 미소, 이제훈의 흔들림, 손현주의 침묵이 그 대답을 대신한다.

 

잔을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맛이 남듯, <소주전쟁>은 상영이 끝난 후 마음에 오래 여운을 남긴다. 무겁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시대와 인간을 담아낸 드라마. 이 영화는 기억될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지키고 싶었던 ‘무언가’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사진 : 영화 '소주전쟁' 포스터 및 스틸컷[㈜쇼박스]